전력산업의 거대한 수레바퀴 안에서 오랫동안 은밀히 굴러온 담합의 고리가 검찰의 칼끝에 걸렸다.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부장검사 나희석)는 15일, 효성중공업·LS일렉트릭·HD현대일렉트릭·일진전기 등 국내 주요 전력기기 제조 대기업과 한국중전기사업협동조합 사무실을 전격 압수수색했다. 이들은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에 따르면 이들 기업은 2015년부터 2022년까지 한국전력공사가 발주한 ‘가스절연개폐장치(GIS)’ 납품 입찰에서 서로 낙찰 순서를 미리 정하고 물량을 나눠 갖는 방식으로 담합을 벌인 혐의를 받고 있다.
당시 한전이 발주한 5,600억 원 규모의 입찰에서 이들 업체는 ‘경쟁자’의 가면을 쓴 채, 실제로는 ‘파트너’로서 손을 맞잡았다. 입찰 전에 낙찰 기업과 단가, 물량이 사실상 합의됐고, 경쟁입찰의 형식만 유지된 것이다.
한전 입찰의 ‘그림자 담합’은 단순한 기업 간 유착이 아니다. 한전이 제시한 기준가격보다 낮은 금액으로 경쟁 입찰이 이뤄졌어야 하지만, 실제 낙찰가는 시장가격보다 높게 형성됐다. 검찰은 이로 인해 전력 설비 조달비용이 상승하고, 결국 국민이 내는 전기요금에도 간접적인 부담이 전가된 구조로 보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이미 이 사안에 대해 행정조사를 진행해 10개 사업자에게 총 391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주요 6개 업체를 검찰에 고발했다. 그러나 단순한 행정제재로 끝내기엔 규모와 기간, 그리고 영향이 너무 컸다. 검찰의 이번 강제수사는 “전력산업 담합의 고질적 구조를 뿌리 뽑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번 담합의 핵심 제품인 **가스절연개폐장치(GIS)**는 전력망의 ‘심장’에 해당한다. 고압 전류를 안정적으로 차단하고, 이상 전류가 흐를 때 전력 시스템 전체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전국 변전소와 발전소에서 쓰이는 이 장비의 단가가 조작되면, 전력망 운영비와 송배전 효율성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즉, 전력산업의 기초를 이루는 공공 인프라가 특정 기업들의 담합으로 장기간 왜곡돼 왔다는 의혹이다.
한 전력업계 관계자는 “한전은 전력 설비 수요를 거의 독점하는 시장이라, 주요 대기업 몇 곳만 손을 잡아도 입찰 경쟁이 사실상 무력화된다”며 “국가 기간산업의 구조적 취약점이 담합의 온상이 된 셈”이라고 지적했다.
검찰은 확보한 이메일과 내부 보고서, 입찰 관련 회의록 등을 중심으로 누가 담합 구조를 설계했고, 실제 실행 지시를 내렸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담합 실무자뿐 아니라 그룹 경영진 선까지 수사망이 확대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담합으로 인해 발생한 부당이득이 수백억 원에 달할 경우, 공정거래법상 형사처벌뿐 아니라 부당이득 환수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한전 역시 “입찰 질서 교란 행위가 확인될 경우 입찰 참가 제한 및 계약 해지 조치를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이 사건은 단지 한 기업의 일탈이 아니라, ‘국가 기간산업’의 공정성에 대한 신뢰가 흔들린 사건으로 평가된다.
수년간 기술력과 시장지배력을 앞세워 안정적인 납품처를 확보해온 전력업계 대기업들이 이제는 법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업계 일각에서는 “이번 수사가 단순한 담합 처벌을 넘어, 전력 기자재 산업의 낡은 유착 구조를 드러내는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검찰의 압수수색으로 시작된 이번 사건이 향후 **‘전력산업 카르텔 해체’**로 이어질 수 있을지, 전국의 변전소와 전신주 너머로 검찰의 시선이 뻗어나가고 있다.
한방통신사 양호선기자 기자 |